2015. 4. 2. 01:19

《상절지백 백마흔여서엇》

<돌고래>
돌고래는 수수께끼 같은 동물이다. 포유류 가운데서도 돌고래는 몸집에 비해 뇌의 부피가 가장 큰 편에 속한다. 침팬지의 뇌 무게가 보통 3백 75그램이고, 사람의 뇌 무게가 1천 4백 50그램인데 비해, 돌고래의 것은 1천 7백 그램이다. 그런 정도의 뇌를 갖고 있으니, 돌고래는 기호를 이해하고 언어를 만들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는 게 확실하다. 그럼에도 돌고래는 그 지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작해야 동물원이나 수족관에서 벌이는 쇼에 출연하여 사람들의 놀이를 흉내내거나 서커스 묘기를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지능은 정말로 스스로에게 아무런 도움을 못 주는 것일까? 돌고래는 포유강 고래목에 속한다. 한마디로 바다에 사는 포유류 동물이다. 그들도 우리처럼 공기를 들이마시고, 암컷들은 새끼에게 젖을 먹이며, 알을 낳지 않고 임신과 출산을 한다. 돌고래의 조상은 옛날에 육지에 살았다. 그들에겐 다리가 있었고, 땅 위를 걷고 뛰어다녔다. 그들은 아마도 악어나 바다표범과 비슷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물 속으로 되돌아갔다. 마치 육지 생활에 염증을 느끼기라도 한 것 같았다. 물에서 나와 우리처럼 육지에 잘 적응해 가더니, 그래도 역시 물이 더 살기 좋다고 생각했는지 훌쩍 떠나 버린 것이다. 1천 7백 그램에 달하는 커다란 뇌를 가진 그들이 바다로 돌아가지 않고 육지에 남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들은 우리의 경쟁자나 선구자가 되었을 것이고, 전자보다는 후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더 많다. 그런데 돌고래는 왜 바다를 택했을까? 바다는 확실히 육지보다 유리한 점을 지니고 있다. 육지에서 우리는 땅바닥에 붙어 살지만, 바다에서는 3차원 속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 또 바다에서는 옷도 필요 없고 집과 난방 설비도 필요치 않다. 바다에는 먹이도 풍부하다. 돌고래가 정어리떼에 다가가는 것은 우리가 슈퍼마켓에 가는 것과 같다. 단지 돌고래는 공짜로 먹이를 구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돌고래의 뼈대를 조사해 보면, 지느러미 안에 길쭉한 손가락 뼈가 아직 들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육지 생활의 마지막 흔적이다. 그 부분의 변화가 돌고래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손이 지느러미로 바뀜으로써 돌고래는 물 속에서 대단히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었겠지만, 그 대신 더 이상 도구를 만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 기관의 능력을 보완하기 위해 도구를 만들어 내는 데 그토록 열을 올렸던 것은, 우리 환경이 우리에게 그다지 적합하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물 속에서 행복을 되찾은 돌고래는 자동차나 텔레비전, 총, 컴퓨터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언어의 필요성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돌고래는 자기들 고유의 언어를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시킨 듯하다. 그들의 언어는 소리를 통해 교신하는 음향 언어이다. 돌고래가 내는 소리의 음역이 대단히 넓다. 사람의 음성 언어는 주파수 1백 헤르츠에서 5천 헤르츠 사이에서 소통되지만, 돌고래의 교신은 7천 헤르츠에서 17만 헤르츠에 이르는 넓은 범위에서 이루어진다. 돌고래의 음향 언어는 아주 풍부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나자렛 베이 커뮤니케이션 연구소 소장인 존 릴리 박사의 견해에 따르면, 돌고래들은 오래 전부터 우리와 교신하기를 갈망해 온 듯하다고 한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해변에 있는 사람들과 우리 선박들에게 다가와서는, 마치 우리에게 알려 줄 게 있다는 듯이 펄쩍 뛰어오르기도 하며, 어떤 몸짓을 하기도 하고, 신호를 보내기도 한다. <돌고래들은 우리가 자기들을 이해하지 못할 때면, 이따금 역정을 내기도 하는 것 같다>라고 존 릴리 박사는 말한다. 우리에게 뭔가를 <가르치고 싶어하는> 그런 행동은 동물 세계 전체를 통틀어 오직 돌고래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다.

--- 에드몽 웰즈

[2015.4.1 22:23] 당직서는 날...
돌고래는 정말 인간에게는 친숙한 동물이다. 생김도 귀엽게 생겨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안좋아하는 사람은 없는 것같다. 그들은 지능도 높고 인간처럼 의사표현이 가능한 소통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바다에서 천적이라고는 거의 없이 살고 있다. 몇년전 제주도에 갔다가 우도를 들어가는 배에서 돌고래를 봤던적도 있다. 에드몽은 돌고래가 과거 육지에서 살다 바다로 다시 돌아갔다 한다. 물속에서의 행동형태는 3차원. 무지 자유롭게 움직일수가 있다. 마치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 듯하듯이 말이다. 지금은 물에 대한 공포를 간직한체 살아가고 있는 나지만 어떤때는 물속에 잠수해서 고요한 물소리를 들으며 누워있던 기억도 있다. 하지만 더큰용량의 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간보다 앞선 문명을 건설하지 못했던 것은 그들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이겨나가는 것 보다 자연의 환경에 순응하는 것을 택해서 였을것이다. 물론 사냥의 노력은 있지만 공짜로 얻을수 있는 물고기 사냥은 공짜를 좋아하면 민머리가 된다는 것을 정확히 보여주는 예이다. 인간들은 자연에 적응하기 보다는 현재를 돌아보면 자연을 이용하고 파괴하며 인간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것을 택했다. 환경파괴와 오염이라는 부작용을 낳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런 과거의 사람들의 무모한 시험과 용기로 지금 현재 이렇게 핸폰에 글을 쓸 수 있게 된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을 내 마음대로 쓰고 알수 없는 곳에 저장하여 몇년 몇십년이 지나도 언제든 다시 꺼내어 볼수 있게된것 이 모든 것이 아마도 인간의 끊임없는 호기심과 노력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무거워진다.

돌고래들은 음의 높낮이, 길이, 주파수를 변화시켜 서로의 감정과 하고싶은 말을 할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목에 있는 성대와 구강구조를 변형시키고 그모양에 피리처럼 날숨을 내쉬며 수많은 소리를 만들어 내고 좀더 그쪽의 근육과 피나는 노력으로 세상의 모든 소리를 비슷하게 모사해 내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는 돌고래의 언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양의 의사소통이 가능하게끔 하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 음악이라는 부분은 돌고래와는 또다른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인간만이 만들수 있는 유희(?), 재능(?)이 아닐까 생각된다. 음악. 어렸을때 난 그다지 음악에 관심이 없었다. 국민학생 시절 학교에서 배우던 음악수업, 방학때 잠깐 가봤던 교회에서 따라부르던 찬송가? 정도 였으나 중학교를 입학하고 2학년 다시 나가게된 교회에서 부터 나의 음악에 대한 관심이 시작된게 아닌가 생각된다. 중들부 선생님이 기타로 반주를 치며 부르던 복음성가를 따라 부르며 아마도 나의 음감은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된거 같다. 당시 변성기를 맞이한 나는 제대로 음을 낼 수 없었고 그래서 여자들은 다 노래를 잘하는지 알았었다. 몇년후 누나의 노래소리를 들은후 나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당시 악기연주라고는 학교에서 배운 실로폰과 피리가 전부였던 나는 피아노학원을 하시는 중등부 여선생님집에 놀러가면 피아노를 쳐보겠다고 건반을 두두렸었다. 선생님은 바이엘책을 주시며 한번 쳐보라고 하셨었다. 그래 당시 양손 이십 몇번까지는 쳤던거 같다. 악보를 보고 있노라면 난 머리속에서 수리계산을 하고 있었다. 콩나물 대가리 한개를 기준으로 반을 쪼개고 또 반을 쪼개고 수없이 쪼개가며 악보를 수학정석을 풀듯 해석을 해나갔었다.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박자와 음의 높이를 근의공식을 외우듯 외웠었다. 하지만 모든것은 머리속에서만 이루어질뿐 몸과 손가락과 목소리는 음이탈만 할뿐이었다. 그러다 난 또다른 악기를 손에 만질수 있게 되었다. 기타. 그 중등부 선생님이 어깨에 매고 치던 악기. 해보겠다고 하지만 역시 독학으로 쉽게 될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포기란 없었지. 다른사람들과는 달리 유전적으로 유난히 작은 나의 손가락으로는 C코드를 잡기란 여간 힘든것이 아니었다. 그때부터인가 어디를 가든 책상모서리에 의자 모서리에 손가락을 끼고 손가락 찢기를 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C-Am-Dm-G7-F. 가장 힘들었던 F코드. 지금도 잡기가 힘든 코드다. 손가락 끝은 스틸 기타줄에 헐고 굳은살이 생기고 1년정도가 흘러 이제는 어느정도 코드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또다른 문제는 오른손 주법이었다. 왼손은 줄을 잡고 있기만 하면 어느정도 되지만 오른손을 움직이며 박자와 강도를 맞춰주어야했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손가락을 하나하나 튕겨주는 아르페지오 주법이었다. 3박자든 4박자든 8분의 6박자든 가능했다. 이렇게 기본을 익히게 되었고 그 이후는 수학이 필요할 뿐이었다. 악보를 보았을때 코드가 어려워 지면 반음을 내리든 한음을 올리든 하여 내가 알고있는 익숙한 코드로 조를 바꿀수가 있었다. 하여 당시 유행하던 가요들도 나만의 악보책을 수작업으로 만들수가 있었고 그때 만들었던 것이 몇년전까지 집에서 굴러다니는 것을 보았었다. 혹시 아직 기타 가방속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많이 불렀던 노래로는 기타 입문곡이라 할수 있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시작으로 큰누나가 좋아했던 이선희 노래들. 당시 아마도 3집인가까지는 앨범 모든 곡을 외우고 다녔던거 같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또한번의 나의 음악생활의 변곡점이 생겼다. 당시 미션스쿨이었던 울학교에는 전통적으로 이어져오는 "에벤에셀" 중창단이 있었다. 목소리는 안좋았지만 그래도 음감 하나로 친구와 같이 중창단에 들어가게 되었다. 점심시간, 방과후시간 모여 중창곡을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1년에 한번 있는 학교축제때 중창발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기억나는 중창곡으로는 "Mother of mine"이란 곡이 있었던거 같다. 울 중창단은 반주없이 아카펠라로 하는 중창이었다. 남자밖에 없는 중창단에서 난 엘토 파트였다. 높이 안올라 가고 낮게 안내려 가는 어중간한 음역을 가진 이들이 맞는 파트다. 축제때나 때로는 다른교회 문학의밤에서 중창을 하곤 했었다. 그때부턴가 아마도 대중가요라는 데 익숙해 지기 시작한거 같다. 언제부턴지는 모르지만 집에 있는 LP 턴테이블로 음악을 듣곤 했다. 내가 직접 산 판은 없었지만 집에 있는 모든 LP를 들었던거 같다. 그렇게 대학생이 되고 잠시 난 음악생활을 접는가 싶었다. 하지만 써클생활을 하며 다시 나의 음악생활은 시작되었다. 당시 아마도 술만 들어가면 부르던 "고래사냥"과 "소양강처녀" 음색은 안좋아도 힘있게는 불렀던거 같다. 써클 여름 합숙을 할때는 동기들끼리 밤에 잠안자고 당시 무섭기만 하던 선배들에게 저항해보려던 의미로 "반선반학가"를 리메이크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합숙소를 탈출하는 있을수 없는 짓을 한후 선배들의 매서운 눈초리를 받으며 얼차례를 받기도 했었다. 그때 당시 동기였던 두녀석과 처음 산을 갔었는데 그산이 바로 "지리산"이었다. 이후 지리산의 매력에 빠져 화대종주 3번, 쏠로 산행 3번. 그중 한번의 천상에서의 하루. 이렇게 나의 산생활이 시작되었었다. 올인했던 써클생활로 인해 두번의 학고를 맞고 결국 군대라는 피난처를 찾아 갈수 밖에 없었다. 이등병, 일등병시절은 나라는 존재는 머리속에만 존재할뿐 겉으로는 나라는 존재는 없던 시절이었다. 상병을 달았을까? 이제야 조금의 나를 만날 수 있던 시절 공군이었기에 한달에 한번 2박3일 특박을 나왔다 들어가며 다시금 나의 음악생활은 시작되었다. 한번은 들어가며 마이마이와 당시 유행하던 테입을 몇게 사가지고 들어가 들었다. 아 이노래구나하고 사가지고 들어갔던 테입은 신승훈 테입이었고 내가 원했던 것은 김건모의 "잠 못 이루는 밤 비는 내리고"였다는 걸 듣고서야 알았다는 것. 그때부터 아마도 귀에는 항상 이어폰을 끼고 살았던 거 같다. 그래서 지금 난청이 있는지 모르겠다. 당시 음악을 들으며 또 다시 시작되었던 새로운 생활이 독서였다. 그 이전에는 거의 책을 손에 들지 않았던 나는 집에있던 누나책인 "닥터스"라는 책을 시작으로 루이제린저의 수필집, 베니스의 개성상인 등. 그러다 내 인생의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만한 사건인 베르나르베르베르의 "개미"를 만나게 되었다. 이렇게 글을 쓰기 시작하게 된것도 바로 이 사건 이후 일어나게된 가닥일뿐이리라. 그와 함께 만나게된 것이 바로 "여치;여행스케치"의 노래들이었다. 멜로도 아닌 액션도 아닌 마치 다큐같은 그들의 음악은 나의 귀를 사로 잡았다. 1집부터 해서 거의 모든 테입을 구매했었던거 같다. 여치의 테입들은 얼마를 들었던지 나중에는 테입이 늘어질 정도 였다. 제대를 하고 복학을 하여 졸업할때까지 나의 음악(여치), 책(베르나르베르베르)는 끝없이 지속이 되었다. 졸업을 하여 회사에 입사하고 난 후 출퇴근 버스 안에서는 귀에는 이어폰 손에는 베르나르의 책을 항상 펴들고 있었다. 테입은 더이상 버티지 못했고 결국 늘어질 걱정없는 CD플레이어를 장막하고 CD를 또 구매하기 시작했다. 여치를 필두로 해서 월급날이면 기본 CD 세개 이상씩을 장만했던거 같다. 그 당시는 우리나라에 노래방이 한참 유행할 때였고 무자개도 갔었던거 같다. 그렇게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또다시 새롭게 시작된 생활이 PC통신(하이텔) 생활이었다. 당시 작은모임 이었던 "백수동"이라는 모임에 가입하게 되며 만나게 된 대모와 상형, 동생들. 나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거의가 백수였기에 난 물주로서 백수동에서 살아 남을 수 있었다. 거의 주말은 서울 번개로 세월을 보낼때였다. 백수동 멤버들은 음악을 사항했고 번개의 필수코스는 노래방이었다. 난 못먹는 술만 먹으면 혼자 나와 길거리에서 파는 인형을 사가지고 (여)동생들 품에 안겨주었었다. 그러다 또다시 시작된 새로운 사건은 그 모임에서 현재 집에서 잠자리에 들었을 마눌님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동갑이었던 마눌님과 또 한 친구는 성격들이 호탕하여 "호소영 탕정아"로 불리워졌고 아직도 나의 핸폰 연락처에는 마눌님이 "탕정아"로 저장되어있다. 난 노래방에서 박완규의 "천년의 사랑"을 부르는 마눌님의 목소리에 너무도 큰 감명을 받았다. 그렇게하여 결국 마눌님과 사귀게 되었고 지금은 떡두꺼비(?) 아니 떡황소 같은 녀석을 얻어 살게 되었다. 결혼할 당시 내가 사모은 시디는 백여장이었고 마눌님 또한 음악에 조회가 깊어 보유씨디가 백여장 이상이었고 LP 까지 삼십여장을 들고 왔었다. 마눌님은 당시 "강산에" 폐인이었다. 마눌님과 같이 일하는 동생은 "안치환" 폐인이었다. 연애할 당시 난 처음으로 강산에 소극장공연을 가게 되었고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무대 앞에 나가 스탠딩으로 뛰며 공연을 누리는 어색한 경험도 하게 되었다. 마눌님은 20대 초반부터 강산에 폐인으로 거의 모든 공연을 따라 다녔다 한다. 같이 일하는 동생이 좋아하는 안치환 공연도. 강산에, 안치환을 나도 좋아했었다. 하지만 그들의 음악을 들은 것은 티비에서 방영되는 곡들 밖에는 접할 수 있는것이 없었다. 하지만 공연장에가서 강산에나 안치환의 다른 곡들을 들어보며 그들의 새로운 매력에 빠져들을 수 밖에 없었다. 결혼후 첫휴가때는 장인어른 카니발을 끌고 남해 땅끝마을로 해서 부산거쳐 구룡포, 울진으로 해서 동해안 강릉까지 올라오는 여행을 했을때가 있었다. 그때 삼천포를 잠깐 들렸었다. 비가오는 밤이 되었을때였는데 해변에서 안치환의 노래소리가 들려왔었다. 뭐 노래 틀어놓고 해변축제를 하나부다 하고 조명이 켜진곳을 가는 순간 조명이 아래에는 빗속에 우산 밑에서 안치환이 기타 하나 들고 노래를 하고 있었다. 그 때의 감동 또한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연애할 때였나부다. 주말 광명에서 마눌님과 그의 패거리 둘과 술한잔 하고 2차 노래방가고 나와 3차 감자탕집 가서 한잔 더하며 감자탕에 마지막 밥을 볶아 먹고 난 새벽 마눌님의 바다보고 싶다는 한마디에 이내 차를 영동고속도로에 올린적이 있었다. 당시 뭐 주말이면 흔히 있는 일이었다. 산보단 바다를 좋아하는 마눌님은 심심하는 하는 소리였다. 갈때는 영동고속도로 하나였지만 돌아올때는 항상 다른 길로 왔다. 올때는 미시령, 한계령, 태백, 울진, 정선, 오대산길 등 같은 길로 오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물론 난 기사였기에 술은 먹을 수 없었다. 술은 거의 마눌님 패거리들이. 그때는 정동진에 갔었다. 도착하니 마눌님이 오늘 벙동진 해변에서 강릉 라디오 공개방송을 하는데 강산에가 나온다고 했다. 하여 그때는 그공연을 역시나 무대 앞에서 스탠딩으로 구경하고 왔다. 라이브의 매력을 한 껏 더 느꼈었던거 같다. 그때 또다른 게스트가 당시 신인이었던 박혜경과 조이박스라는 그룹이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조이박스의 "세종대왕이 떡볶이 먹었데"라는 곡이 생각난다. 그 후에도 나의 음악생활이 멈춘것은 아니다. 내가 선호하는 장르는 주로 발라드 계열 조용한 노래들이었다. 어느날 라디오에선가 귀에 꽂히는 노래를 듣게 되었다. 임정희의 "거리의 천사들". 바로 씨디를 장만했다. 그리고 차에서 출퇴근하며 거의 일년동안을 한번도 안빼고 들었던거 같다. 결국 씨디플레이어 헤드가 맛이 가서 A/S를 받기도 했었다. 회사 여직원이 가끔 내차를 타게 되면 맨날 똑같은 노래만 듣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날인가 티비를 보다가 새로운 노래를 듣게 되었다. 제목이 뭔지는 가물가물해졌지만 "왁스"의 노래였다. 어디 콘서트장이었나였는데 평소 티비에서 보던 무대의상도 아닌 평상복 청바지에 체크무늬 난방을 입고 노래하고 있는 왁스의 노래를 듣고 또다시 씨디를 장만하게 되었다. 그건 아마도 임정희에 뒤를 이어 반년인가를 차속 씨디플레이어에 들어가 있었던거 같다. 그땐 씨디를 직접 컴터로 음악파일로 만들어 회사일로 에콰도르 출장을 갈때 아이스테이션에 담아 가지고 가서 출장기간 내내 들었던거 같다. 그렇게 나의 음악생활이 지속되면서 점점 나의 선호장르였던 느린 발라드는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고 장르 또한 락, 힙팝, 랩 등의 거의 모든 장르로 넓어지기 시작했다. 음악적으로 전문적인 지식은 없었지만 들었을때 좋다는 생각이 들으면 그냥 계속 들었던거 같다. 물론 넓어지지 않는 한가지는 거의 모든 노래는 여자들의 노래들을 좋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스러운 목소리 보다는 가창력 있고 허스키하며 소울이 있는 목소리를 주로 찾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의 음악생활은 계속되며 미디어는 mp3로 바뀌어 갔고 씨디는 잊혀지며 다운이라는 새로운 방법에 적응하게 되었다. 아이스테이션에 음악을 넣어 다니며 들었고 때론 예전 매니아였던 피쳐폰 캔유폰에 담아 듣기도 했었다. 그러면서 몇년전에는 결국 스맛폰으로 갈아타게 되면서 별도의 플레이어가 필요없이 모든것을 스맛폰에 담아 가지고 다니며 듣고 있다. 또한 새로운 또하나의 생활은 영화감상이었다. 불법이었겠지만 영화파일을 다운받아 영화도 무지 보았던거 같다. 그렇다고 음악생활의 종지부는 아니고 계속되었다. 또한번의 변화는 얼마안된거 같다. 장르의 구분없이 음악을 듣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기존 음악들이 식상하게 들리기 시작했었다. 물론 과거의 명곡들이 싫어진것은 아니었다. 그것도 좋았지만 뭔가 새로운것에 대한 갈망이 생겼다. 그러면서 듣게 된것이 요즘 대세들의 특히 걸그룹들의 노래들이었다. 소녀시대, 다비치(걸그룹이 아닌가?), 씨스타, 카라, F(X), 누애니원, 애프터스쿨, 걸스데이, 에이핑크. 조금 건너뛰어 EXID까지. 요즘은 멜론등에서 남자가수 거의 빼고 여자 가수 노래들만 추려 담아 듣는거 같다. 이후 또 하나의 큰 변화는 위에서 얘기했던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이었다. 언제부턴가 대세가 되어가는 오디션 프로그램. 처음 슈스케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위대한탄생, K팝스타를 보며 그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이 조금이 해소되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기존 명곡들을 참가자들의 색깔을 입혀 새롭게 선보이는 오디션 프로그램들을 보며 갈망이 어느정도 채워져 가는거 같다. 곡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새로운 목소리 이게 아마도 찾고있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불후의명곡도 그런 관점에서 즐겨봤던거 같다. 요즘은 K팝스타를 열심히 보고 듣는다. 그중에 눈에 띄었던 지난번 글에 올렸던 케이티김이라는 미국에서 온 참가자. 평소의 느릿느릿하고 어눌한 말투와는 달리 노래를 시작하면 나타나는 그녀만의 소울. 그것에 지금은 빠져있는거 같다.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 양화대교, Because of you, 니가 있어야할 곳, 인디안인형처럼, 촛불하나, 인디안인형처럼, 하루하루"까지. 요즘은 케이티김의 매력에 심사위원 유희열이 얘기했던 "개미지옥"에 빠져 있는거 같다. 이렇게 나의 음악생활은 계속 컨티뉴 하고 있다.

--- 개미지옥에 빠진 글쓰는하얀개미

p.s 여기까지 쓰고 나니 그래도 나의 음악생활에 빠진부분이 있는거 같다. 아직 배우지 못한 피아노와 드럼, 일렉트릭 기타, 섹스폰과 대학 써클생활시절 부산 사상공단에서 듣던 변진섭의 희망사항, 새들처럼. 3년째 하고 있는 성가대 베이스 파트, 안치환 라이브의 공중파와는 전혀다른 경험, 알리의 지우개, 고아라의 파파ost, 이민정의 원더플 라디오ost 참쓰다, 아주 예전에 엄청 길었던 "긴노래" 등 아직도 많은 얘기가 빠져있지만 이제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