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절지백

<상절지백 여든여더얼>

글쓰는하얀개미 2012. 5. 22. 09:18

<파동>
모든 사물과 관념과 사람은 하나의 파동으로 귀결될 수 있다. 형태파, 소리
파, 그림파, 냄새파가 있다. 이런 파동들이 유한한 공간속에 있으면 다른
파동과 필연적으로 상호 간섭하게 된다. 흥미있는 것은 파동들, 물체, 생
각,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 간섭의 연구이다. <록큰롤>과 <클래식>
음악을 혼합하면 어떤 음악이 생겨날까? <철학>과 <정보학>을 섞으면 어떤
학문이 될까? 아시아의 예술과 서구의 기술을 섞으면 어떤 것이 나타날까?
잉크 한 방울을 물에 떨어뜨린다고 하자. 두 물질은 처음엔 아주 단조로운
상태에 있다. 잉크 방울은 까맣고 물은 투명하다. 잉크가 물에 떨어지면서,
일종의 위기가 조성된다.
이 접촉에서 가장 흥미로운 순간은 혼돈의 형태가 나타나는 때이다. 그 순
간은 희석되기 직전에 온다. 서로 다른 두 요소끼리의 상호 작용은 아주 다
양한 모습을 빚어낸다. 복잡한 소용돌이, 뒤틀린 형태가 생기고, 온갖 종류
의 가는 실 형태가 생겨났다가 점점 희석되어 결국엔 회색의 물로 변한다.
물질의 세계에서는 이렇게 아주 다양한 모습을 고정시키기가 어렵지만, 생
명의 세계에서는 어떤 만남이 골수에 뚜렷이 박힐 수도 있고 기억 속에 머
물 수도 있다.

---- 에드몽 웰즈.

아침부터 어제 넘어져 아파오는 왼쪽 엉덩이를 모시고 출근하는 버스 안에
서 마음만은 편안했다. 간만에 버스안에서 충분한 수면을 취할수가 있었다.
깜빡하면 내릴 사무실 앞을 지나 주행시험장까지 들어가는 일이 일어 나지
만 사무실 사람의 도움으로 제 위치에서 내릴수가 있었다. 모처럼 만에 갖
는 편안함. 이유가 뭘까. 오늘 사무실 우리 팀은 나혼자 만이 자리를 지키
게 된것이다. 위로 직속 상관인 과장과 대리 모두 소하리 공장으로 회의를
간다는 희보를 어제 들었기 때문이다. 사무실을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밀려
오는 여유있는 느낌. 우선 커피를 한잔 타서 마셨다. 앞을 봐두 뒤를 봐두
아무도 없다.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목소리의 나의 이름도 안들린다. 느
긋한 마음으로 부팅시 들어가는 그룹웨어 안을 샅샅이 훌터보고 나니 9시도
안되었다. 그럼 무슨 일부터 해볼까. 생각을 정리했다. 평소에는 가져보지
못하는 시간. 나 나름대로의 가장 느긋한 마음으로 쌓여있는 일거리들을 정
리했다. 우선 몇일동안 나의 머리를 괴롭히고 있는 폭스프로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의 에러. 오전의 모든 시간을 투자했다. 무엇인가 잘못된 명령어가
없이는 에러가 날수 없는 프로그램. 결국은 찾아냈다. 분모에 영이 들어갔
으니 에러가 날수밖에. 명령어의 순서 하나 차이로 몇일간의 시간을 투자했
건만 이제사 풀린것이다. 그때의 그 기분이란. 레포트가 프린팅되어 나오는
소리는 아마 여인테들의 산고끝에 나온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과 비교
되리라. 오늘 에러의 원인을 찾아낼수 있었던것은 아마 아무도 간섭하지 않
는 여유있는 정신세계속에서 나왔을 것이다. 오후가 들어 팀동료의 파견으
로 떠맞게 된 타부서 실적 수배. 그렇게 안나오던 실적도 전화 한통화로 마
무리를 지었다. 작년 한해 고생하며 만들어놓은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에
데이터를 업데이트하고 파견 나간 팀동료의 결혼을 위해 특보를 작성하고
나니 어느정도 그동안 쌓였던 업무가 정리가 되었다. 오후 늦게 탕모양의
부탁으로 전공분야의 엑셀작업을 심심풀이로 했다. 완벽하게는 못해주었지
만 어쩌리 프로그램 버젼이 틀린것을. 바이러스 걸린거 치료하라고 세심하
게 백신 프로그램도 멜로 띄워주고 저녁을 먹고 난 시간에는 느긋한 마음으
로 인터넷으로 자료를 받다 뿌듯한 마음으로 퇴근버스에 올랐다. 음악을 들
으며 비록 않좋은 조명이었지만 책을 보았다. 안토니오의 시민권 획득으로
시작하여 위기를 맞은 베니스까지. 이렇게 하루가 알차고 뿌듯한 마음으로
보낸다는 것은 정말로 즐거운 일이다. 앞으로 언제 또다시 찾아올지는 모르
지만 까끔은 이런날이 있기에 평소의 쫒기는 일상에서도 견디어 내는 것이
리라. 엄니의 애청 프로그램인 '그대 나를 부를때'를 보았다. 마지막회다.
최수종의 아무래두 어색해만 보이는 연기. 이쁘지만 답답하고 안타까워 보
이는 김지수의 연기. 결국 인욱이의 죽음으로 모든 사건이 해결되는 드라마
의 끝을 보며 엄니가 한말씀하신다. '내가 썼다면 인욱이를 안죽이고 살린
다. 중상정도로 병원에 입원시키는 걸로' 속으로 나도 엄니의 말에 동의했
다. 굳이 인욱이를 죽여야만 했을까? 임프 시대에 마음이 평안하지 않은 수
많은 시청자들에게 굳이 그런 안타까운 결말을 지어야만 했을까? 어차피 실
화가 아닌 드라마 이건만 해피앤딩으로 끝을 냈다면 수많은 시청자들은 편
안한 마음으로 오늘 잠자리에 들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뻔한 얘기일지라도 어차피 지어낸 얘기라면....

---- 아쉬운 정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