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절지백

<상절지백 스믈두우울>

글쓰는하얀개미 2012. 5. 21. 18:44

<이종교배(異種交配)>
개미 둥지에 다른 종이 섞여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개미는
저마다 자기 도시의 고유한 냄새를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인간 세계
에서 볼 수 있는 것만큼 그렇게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흙을 채운 어항에 불개미 100마리와 검은 목축 개미 100마리를
함께 넣으면 어떻게 될까? 두 종 모두에 알 낳는 여왕개미 한 마리씩을 포
함시켜서 말이다. 그러면 우선 몇 차례의 작은 충돌이 일어난다. 그러나 사
망자가 생길 정도의 충돌은 아니다. 그 후에는 더듬이들을 맞대고 긴 토론
을 벌이고 나서 함께 개미 둥지를 건설해 나가기 시작한다.
어떤 통로는 불개미의 체구에 알맞게 되어 있고 어떤 것은 검은 목축 개미
에 알맞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종과 교배를
해서 서로 섞인다. 이상의 관찰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분명해진다.
즉 개미 세계에서는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어떤 종이 도시 안에 게토와 같
은 특별 보호 구역을 만들어 다른 종을 격리시키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 에드몽 웰즈

전에 써놓고 여적 못올리고 있던 글입니다. 안녕하세요...여러분... 이제야
다시 마음에 좀 여유가 생기는가 봅니다. 여유라... 여유가 아니라 휴가군
요. 일주일간의 휴가... 옛날 영화중에 '7일간의 외출'인가 하는 영화도 있
었던것 같은데... 이제 앞으로는 일주일간의 휴가가 일년에 가장 오래 쉬는
날이 될것이라는 생각에 약간은 씁쓸한 기분이 듭니다. 뭐 이런 휴가를 누
군가와 멋지게 보낼 계획이라도 있으면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니고 정말 찹
찹합니다. 그래도 뭐 휴가비라는 것도 받고 보니 그리 싫지는 않군요.
다들 이 더위에 잘들 지내는지 모르겠군요... 올해는세삼 더위가 느껴지는
군요.. 왜 그럴까 생각을 해보았더니 이젠 내가 사회생활을 하는 직장인이
라는 것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학생이라는 신분으로 그 당
시에는 몰랐지만 많은 자유를 누리며 살았지요. 학교 가기가 싫으면 그냥
잠을 자버렸지요. 그래도 뭐라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만 성적표 만이
권총으로 무장을 했지요.. 그 무장은 방학을 이용한 계절학기로 해제할수가
있었지요. 그렇지만 항상 자유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면서도 자유를 마음
껏 누리면서 살았지요... 하지만 이제는 그런 자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뭐 이 직장을 그만두고 진정한 백수동의 일원이 된다면 모르지만... 그젠가
소연누나가 그러더군요.. 나두 진정한 백수동의 일원이라구... 그럼 이거
나 직장 때려쳐야되는건가요? 음...모르겠다.
아마 제대가 가까왔을 때 일겁니다. 큰누나가 미술학원을 차렸다는 소식이
들리더군요.. 뭐 군대라지만 한달에 한번씩 나오는 특박으로 항상 소식은
듣고 있었지요... 특박 나올때마다 찾아가는 누나의 학원은 색다른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 당시 난 군바리 였으니까요.. 요자 한명 존재하지 않는 그
래서 더욱 그 아이가 눈에 띄었는지 모릅니다. 그 아인 누나네 학원의 선생
님이었지요... 특박때마다 가보았지만 거의 말한번 제대로 해본적이 없었답
니다. 그러면서 제대 날짜가 다가왓지요. 93년 2월 15일 드뎌 제대를 하게
되었지요... 복학은 3학년으로 해야하는데 할수는 있었지요.. 하지만 그당
시 전 복학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를 않앗지요. 복학할 용기가 나질 않
았지요.. 그리고 누나가 4월인가 결혼을 앞두고 책장과 책상,학원에 옷장과
신발장을 만드는 일이 있었지요.. 난 그핑계로 복학을 결국 1년 미루게 되
었답니다. 제대후 학원에 들렸을때 였습니다. 근데 그 아인 그날부로 학원
을 그만둔다는 날이었습니다. 그날 난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기회의 하나다
라고 생각을 하게되었지요. 그 아인 그리 이쁘지도 않았고 말도 잘 하지는
않았지만 저에겐 당시 귀여워보였습니다.(지금은 아니지만...) 그래 퇴근할
때 같이 차한잔하자고 용기를 내어 말을했지요. 그 아인 흥쾌히 허락을 하
였고 우린 차한잔 대신에 술을 한잔 하게 되었지요. 못먹는 술이지만 마셨
답니다. 그리하여 우린 가까운 사이가 되었지요. 아니 가까운 사이가 되었
다고 생각을 했었지요. 나에게 지금껏 살아오면서 유일하다는 친구들과 그
아이의 친구들과 우리는 자주 어울렸지요. 내 친구중에 두명은 당시 자가용
을 가지고 있어 우리의 활동 범위는 무지 넓었답니다. 저녁 늦게 까지도 시
내를 돌아다닐수 있었고 대구탕을 먹으러 아산만까지 가기도 했었고 용인자
연농원, 과천 현대미술관(?) 등등 여러곳을 몰려 다녔었지요. 그 당시 전
무척 행복했었답니다. 그 당시 전 어느 누군가에게 푹 빠져보고 싶었으니까
요. 그렇게 두달간인가의 시간은 흘러 누나의 결혼 준비는 끝이 났고 나의
일도 마무리를 하고 진정한 백수가 다시 되었지요. 그러던중 친구중 건설회
사에 다니는 아이가 있어 대전으로 소위 '노가다'라는 일을 보름간 하러 가
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그 아이와의 사이에서 뭔가 금이 가는 것
을 알게되었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그 당시 아니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때 왜 그렇게 되었는지. 집으로 전화를 해도 받지를 않았고 통
화를 해도 신통치가 않았답니다. 보름만의 노가다를 끝내고 올라왔지만 상
황은 마찬가지 였답니다. 전화를 해도 받지를 않고 만나주지도 않는것이 었
습니다. 나로서는 처음 아니 그전에 한번 있었군..히히.. 나로서는 그런것
이 너무도 싫었습니다. 그런상황이... 하지만 난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왜 그런 상황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기 전에는 포기할수가 없었답니다.
전 오기가 있거든요.. 고집이 무척 셌지요. 어렸을때는 '여고집'이란 소리
도 많이 들었었으니까요. 그 아이를 만나기 위해 집으로 꾸준히 전화도 했
었고 어느때는 집앞에 가서 기다리기도 했었지요. 하지만 소용이 아니 용기
가 없었답니다. 그 일이 생각나는 군요.. 한번은 인형하나를 그 집 대문 안
에 몰래 두고 온적도 있어요...하하하. 나두참. 그런 상황에서 전 다시 엄
니 친구 분이 소개해준 자그마한 회사에 아르바이트로 취직이 되었지요. 그
때가 아마 6월인가 이었을겁니다. 삼성에 부품을 납품하는 회사였지요.. 티
브이 브라운관을 지지해주는 프레임을 납품하는 회사였지요. 그 부품을 납
품하는 차의 조수일을 했지요. 오전 오후 두번 납품을 하는데 5톤 트럭으로
한차를 실고 가서 내려놓고 다시 빈 박스를 가지고 오는 일이었지요. 그 부
품들은 무척 무거웠습니다. 그걸 여섯박스를 쌓아가지고 갈쿠리로 끌고 다
녀야했지요. 무거워서 들수는 없었습니다. 여섯박스를 쌓으면 제키보다 50
센티는 더 높았지요. 넘어지면 불량이 나버리니 조심해야했지요. 시간은 많
이 걸리는 일이 아니었지만 힘을 한번에 많이 서야했기 때문에 또 한여름이
어서 더위로 무척 고생을 했었지요. 하지만 월급을 받는 날은 무지 좋았지
요. 당시 한달에 60만원을 받았지요. 그렇게 큰돈을 벌기는 생전 처음이었
답니다. 그러던 중에도 그 아이에겐 계속 연락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드뎌 만나자는 소리를 듣게 되었지요. 물론 기뻤지요. 우리는 다시
만나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얘기를 나누었고 술도 먹었지요.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점점 그 아인 나의 전화를 피했고 전화를 받으면 만
나기가 싫다는 말 뿐이었지요. 이유를 알고 싶었지만 그 아인 그냥 싫어졌
다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답니다. 그러던중 난 세달 다니던 회사를 말할
수없는 이유로 그만두고 다시 백수가 되었지요. 난 그 아이가 왜 내가 싫어
졌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때쯤엔 이미 예전의 그런 감정은 거
의 사라지고 없어진 다음이었지죠... 아마 오기가 발동했을겁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 아이가 전화를 해서 아르바이트 자리가 하나 있다고 소개를 시켜
주더군요... 이게 왠일일까요? 하지만 별일 아니었습니다. 역시 그 아인 만
나주지 않았으니까요. 그 아이가 소개시켜 준곳은 여기 수원에 위치해있는
'국립지리원'이라는 곳이었지요. 그곳에는 그 아이와 젤로 친한 나도 이미
알고 있는 그 아이 친구와 그 아이의 친 언니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습
니다. 그런 곳에 절 소개시켜준것에 의아해했지만 그 이상은 알수 없었습니
다. 아마 그때가 11월쯤 되었을 겁니다. 그 곳의 일은 힘든 일이아니었지요
. 그 당시 우리나라의 지도 들은 60년대 만들어진 지도를 아직까지 쓰고 있
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지명과 바뀌어진 지명, 그리고 실제로 불리어지는
지명들을 새로 만드는 작업을 했지요... 하루종일 지도만 바라다 보는 일이
었지요. 관공소 아르바이트로 일당 2만원을 받고 했으니까 그것도 짭짤했지
요. 그곳에서 지내며 전 그 아이 친구와 그 아이 언니와 또 같이 일하던 많
은 사람들(아르바이트생들)과 친해졌지요. 그 당시에도 난 그 아이를 포기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아이 친구를 통해 계속 만나자는 메세지를 보냈었지
요. 결국 어느날인가 난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지요. 그러나 이젠 기쁜 마음
은 사라진지 오래였습니다. 다만 '왜' 그 이유를 알고 싶었을뿐입니다. 한
호프집에서 퇴근후 만났지요. 6개월 만인가 다시 본 그 아이는 겉모습은 그
대로 였을지는 모르지만 이미 다른 느낌을 풍기고 있었습니다. 거기서도 난
그 이유를 속시원하게 들을수가 없었습니다. 단지 내가 싫어졌다는 것밖에
는.... 그 날 이후 전 드뎌 그 아이를 잊기로 했지요... 하지만 그 아이 친
구와 언니는 더더욱 가까와 졌지요... 거기 같이 아르바이트 하던 사람들하
고 더더욱 친해졌지요... 년말에는 거의 술로 세월을 보냈지요... 일주일에
거의 4,5번은 술을 먹으러 갔고 10일동안 같은 디스코장을 4번이나 갈정도
였으니까요... 나중에는 거기 웨이터가 다 알아보더라구요... 이렇게 해서
한 아이는 내 머리속에서 잊혀졌지만 다른 새로운 많은 사람들의 모임의 한
일원이 되었지요... 요즘은 거의 못보지만 그래도 년말이면 망년회에서 한
번씩 볼수 있답니다. 이제는 서로들 다 다른 직장들을 갖고 살지요.. 한 누
나는 올해 시집을 갔다더군요... 들리는 얘기로 그 아인 언니와 같이 미술
학원을 차렸다고 하더군요...
참나 내가 왜 이런 얘기들을 이렇게 쓰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뭐 자랑거
리라구... 지루했지요? 아마 그랬을겁니다. 나두 쓰면서 이렇게 지루한데.

다들 오늘은 볼수 있을까요? 오늘은 정팅날인데 저번 수요일 처럼 아무도
없는것은 아니겠지요? 그럼 여러분 있다가 뵙지요....

---- 횡설수설한 정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