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두의 소년 혁명>
중국 쓰촨[四川] 성의 성도(省都)인 청두[性都]는 1967년까지만해도 조용한도시였다. 히말라야 산맥 기슭, 해발 1천 미터 되는 곳에 자리잡고 있는 이유서 깊은 성곽 도시는 인구가 3백만이었는데, 그 주민의 대다수는 베이징이나 상하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모르고 살았다. 당시에 중국의 대도시엔 인구가 넘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중국 정부는 대도시의 인구를 지방으로 분산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부모와 자식이 서로 헤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부모는 농촌으로 가고, 자식은 훌륭한 공산당원이 되기 위해 홍위병 양성소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 홍위병 양성소는 강제 노동 수용소나 다름없을 만큼 생활조건이 몹시 열악했다. 소년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심지어는 아이들을 상대로 톱밥을 주원료로 한 섬유소 식품에 관한 실험이 행해지기도 했다. 아이들은 파리처럼 죽어 나갔다.
그 무렵, 권력 투쟁이 한창이던 베이징에선, 마오의 공식적인 후계자이자 홍위병의 책임자로서 문화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던 린 피아오[林彪]가 마오의 총애를 잃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자 공산당 간부들은 홍위병들에게 폭동을 부추겼다. 그것은 그 당시 중국의 특수한 사정에 기인한 아주 미묘한 사건이었다. 모택동주의의 병영을 탈출하고 교관들을 구타하는것이 바로 모택동주의의 명분 아래 행해졌으니 말이다.
병영을 뛰쳐 나온 소년 홍위병들은 부패한 권력에 맞서 모택동주의의 복음을 전파한다는 명목을 내걸고 전국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 중의대다수는 중국에서 도망쳐 나갈 길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기차역으로 몰려가서 서쪽으로 떠났다. 거기로 가면 몰래 국경을 넘어 인도 땅으로 들어갈 수 있는 비밀 루트가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쪽으로 가는 모든 기차들의 종착역은 청두였다. 그리하여 그 산악 도시에 열서너 살 난 소년병 수천 명이 갑자기 들이닥치게 되었다. 처음엔 그 소년들과주민들 사이에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소년들은 병영에서 겪은 고초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이야기했고, 청두의 시민들은 그들을 측은히 여겨 먹을 것도 주고 잠자리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소년병들의 물결은 계속 청두 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처음엔 수천에 지나지 않던 그들의 수가 무려 20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때부터 소년들은 주민들의 호의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게 되었다. 좀도둑질이 다반사로 행해졌고, 도둑맞기를 거부한 상인들은 몰매를 맞기 일쑤였다.상인들은 참다못하여 청두 시장을 찾아가 시급히 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시장은 어떤 대책을 마련할 겨를도 없이, 소년병들에게 끌려 나가 자아 비판을 해야 했다. 자아 비판이 끝난 뒤에 시장은 뭇매를 맞고 쫓겨났다. 소년병들은 새 시장을 뽑기 위한 선거를 계획하고 자기들의 후보를 내세웠다. 그들의 후보는 볼에 살이 통통한 열세 살짜리 소년이었다. 그 소년은 실제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고 다른 홍위병들의 존경을 받을만한 어떤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다. 온 도시의 벽과 담에 그에 대한 지지를 선동하는 벽보가 나붙었다. 그 소년이 그다지 훌륭한 웅변가가 아니었기때문에 그들은 대자보를 통해 자기들의 정책을 알렸다. 소년 후보는 별다른어려움 없이 당선되어 소년들의 시 정부를 구성하였다. 열다섯 살 난 시의원이 그들 중의 최연장자였다.
이제 좀도둑질은 더 이상 범죄가 아니었다. 상인들은 새 시장이 부과하는 새로운 세금을 내야 했고, 홍위병들에게 거처를 제공하는 것은 시민들의 의무가 되었다. 그 도시는 대단히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홍위병들이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이 외부에 알려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청두의 상인들은 그 사태에 불안을 느끼고 그 지방의 지사에게 대표를 보냈다.지사는 사태가 대단히 심각하다고 판단하고 군대를 보내 폭도를 진압해 달라고 중앙 정부에 요청했다. 20만의 홍위병들에 맞서 중앙 정부는 수백 대의 전차와 수천 명의 중무장한 군인들을 보냈다. 그들이 받은 명령은 열다섯 미만의 소년들을 모두 죽이라는 거였다. 소년들은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 안에서 저항하려고 했다. 그러나 청두 시민들은 그들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들은 무엇보다 자기 자식들이 애먼 죽음을 당할까 걱정하면서 자식들을산 속으로 피신시키는 일에 골몰하였다. 이틀 동안 어른들과 아이들이 맞붙어 전투를 벌였다. 홍군은 공중 폭격으로 소년들의 마지막 남은 저항의 보루를 날려 버리고 전투를 마무리하였다. 소년병들은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그 사건은 한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마침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중국 방문을 앞두고 있던 터라 중국을 비판하기가 곤란하였기 때문이다.
---- 에드몽 웰즈.
원래 상절지백의 내용들이 서로 연관성이 없이 이얘기 저얘기 마구자비로 나오고 엉뚱하기에 또 인간계와 개미계 그리고 이 상절지백이 서로 연결되어 이해를 해야 하기에 이렇게 오랜만에 써보려니 뭔 이야기르 하려고 이얘기가 등장했는지 가물가물하다. 책에서 손을 놓은지도 오래되어간다. 개미!개미혁명! 상절지백! 타나토노트! 여행의 책! 이것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들이다. 이 모든 책들을 읽으며 난 베르나르에게 매료되었고(특히 개미와 개미혁명, 이둘은 스토리가 이어지는 한권의 책이라 할수 있다.) 그 다음 나올 베르나르의 책을 기다려왔다. 그런데 그 이후는 좀 뜸하여 거의치쳐갈때즘의 얼마전 드디어 베르나르의 책이 나왔음을 인터넷 종로서적 사이트를 검색하던중 발견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아버지' 였던가 아직 무슨책인지는 모른다. 그저 진화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뿐. 이번에도 개미와 연관이 있을지 그것도 모른다. 그저 다음주 들어갈 2박3일의 교육동안 읽을 책이 생겼다는 것이 기쁠뿐이다. 또다시 기대가 된다. 가슴이 뛴다.
창밖이 잠잠해졌다. '올가'가 지나간 것일까? 아까 기상특보로는 경기만에서 잠시 머물로 정신을 가다듬고 있다하더니 한참동안 창밖을 뒤흔들던 진동이 멈추었다. 내륙으로 들어서며 소멸한 것일까? 흠. 말을 하자마자 난 아직 살아있어하며 창밖을 뒤흔드는군. 맥없이 지나가버린 장마를 보내며 뭐 이런 장마가 있남하고 아쉬워했는데 그때보다 더 많이 이렇게 비가 오니나로서 좋아해야 마땅할진대 씁쓸하다. 내가 원한건 그저 비였는데 수많은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고 삶의 터전을 앗아가버리다니. 아무 피해없이 그저 비만 왔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까 뉴스시간 우리 대통령 할아버지가나오시더니 수해대책방안인가를 다시 점검한다더군. 참나. 매번 똑같은 수해를 당하면서 당하고 나면 대책방안 강구라니. 허탈한 웃음밖에는 안나왔다. 뭐 내가 어찌 할수 있는 방법은 아니지만. 하여튼 올가덕분에 이번 휴가를 이렇게 멋지게 방콕을 하며 보내고 있다. 일주일이라는 엄청난 휴가를맞이하여 이렇게 집에만 있으니 엄니가 어제는 그러더군. '노래방이라도 한번 가야할텐데....' 그래도 아직 휴가가 끝난것은 아니니까 기다리련다.
---- 방콕에간 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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