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5. 22. 09:09

<상절지백 이른다서엇>

<문명의 충돌>
일본에 상륙한 최초의 유럽인은 16세기의 포르투갈 탐험가들이었다. 그들은
서해안의 한 섬에 닿았는데, 그곳 다이묘(大名)는 아주 정중하게 맞아주었
다. 그는 <코쟁이들>의 새로운 기술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특히 조총이
마음에 들어서 그는 명주와 쌀을 주고 그것을 얻었다.
다이묘는 성의 대장장이에게 그 놀라운 무기와 똑같은 것을 만들라고 지시
했지만 대장장이는 총의 후미를 막을 수가 없었다. 일본산 조총은 번번이
사용자의 면전에서 폭발했다. 포르투갈 인들이 다시 항구에 들어왔을 때,
다이묘는 포르투갈의 대장장이에게 어떻게 하면 화약이 폭발할때 총의 마구
리가 터지지 않게 할 수 있는지를 자기 대장장이에게 가르쳐주라고 부탁했
다.
그리하여 일본인들은 많은 양의 조총을 만드는 데 성공했고, 그로 인하여
나라의 전쟁 규범은 뒤죽박죽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전쟁은 으레 사
무라이들이 칼을 가지고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다 노부나
가 장군은 직접 조총 부대를 창설하여 속사로 적의 기마병을 잡는 방법을
가르쳤다.
물질 문명에 이어, 포르투갈 인들은 두 번째 선물, 즉 정신적 선물인 기독
교를 가져왔다. 당시는 마침 교황이 세계를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갈라주던
시기였다. 일본은 포르투갈에 맡겨졌다. 그리하여 포르투갈 인들은 예수회
의 선교사들을 파견했고, 그들은 처음엔 대단히 환영을 받았다. 일본인들은
이미 몇 가지 종교를 융합해 놓고 있던 터라, 기독교도 자기들의 종교에 통
합시킬 하나의 외래 종교쯤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교리의 배타
성이 마침내 그들을 화나게 했다. 기독교는 다른 모든 신앙은 잘못된 것이
라고 주장했고, 일본인들이 아무런 이의없이 숭배하는 그들의 조상들이 세
례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옥 불에 타고 있을거라는 말을 서슴치 않았
다. 그런 종교가 어찌 보편적인 종교라는 뜻의 <카톨릭>이라는 이름을 내세
울 수 있는가?
기독교의 독선적인 태도가 결국 일본인들을 자극했다. 일본인들은 대부분의
예수회 선교사들을 고문하고 학살했다. 그 뒤 시마바라 폭동(31)이 일어났
을 때는 이미 기독교로 개종한 일본인들이 수난을 당했다.
그때부터 일본인들은 서양인들이 상륙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단 한 번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어떤 섬에 네덜란드 상인들이 상륙한 적이 있었지만,
그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일본 열도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 에드몽 웰즈.

(31)시마바라 폭동 : 일본 큐슈 섬에 있는 시마바라 반도에서 1637년 2만이
넘는 기독교인들이 일으킨 봉기.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이 점점 귀찮아진다. 전엔 꺼리낌없이 그저 같이 있다
는 것만으로도 행복이었고 즐거움이었거늘 요즘 들어 점점 증상이 심해진
다. 몇일전 친구놈한테 전화가 왔다. 누구 여동생 결혼식이 요번주 토요일
이라구. 그 친구들은 나와는 벌써 중2때부터니까 십년이 훨씬 넘어버린 친
구들이다. 고민 많던 사춘기를 그들과 함께했고 꿈 많던 이십대 초반에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그런 친구의 여동생의 결혼. 여동생을 자주본것은 아
니지만 그래도 오빠친구들이기에 가면 라면도 끓여주고 하던 동생이다. 그
런 동생의 결혼식에 마땅히 가야만하는 친구들의 얼굴을 봐서라도 가야하는
것이건만 난 오늘 집에 있었다. 오후에 그 친구놈들한테 전화가 왔다. 다들
모였다고. 오랜만에 모여 술한잔하자고. 그 친구들을 못보구 지낸지도 오래
되었다. 올초에 한놈 결혼할 때였으니까. 그런데 나가기 싫었다. 왜냐. 그
냥. 조금 있다 다른 놈한테 전화가 왔다. 나오란다. 우리에게는 친구인 형
이 한명있다. 나이는 비록 우리보다 두살이 많지만 어렸을적 몸이 아파 우
리와 같은 학년이었다. 그 여동생과 같은 학년이지. 그 형이 12월에 결혼을
하는데 신부감 상면을 한단다. 당연히 나가야하는 것을 난 안나간다했다.
왜냐. 그냥. 나가기가 싫었다. 형이 퇴근을 한후 작은 매형이 집에 왔다.
뻔할뻔자로 술마시러 온거다. 큰매형도 이미 연락을 취한 상태였다. 술마시
러 나가자 하는데 안나갔다. 왜냐. 그냥. 매형들과는 난 거리가 좀 있다.
물론 나이의 차이에서 오는것도 있겠지만 뭔지모르게 어울리지를 못한다. 9
시가 넘어 전화가 왔다. 형이 술을 많이 먹어 집에 못간다고 빨리나오라고.
벌써 취했을리 없었고 날 끌어내기 위한 수라는것을 알았지만 우선 나갔다.
그냥 있고 싶엇지만. 역시나 날불러내기 위한 수였다. 하지만 그 자리에 앉
아 잇을수가 없었다. 물론 형, 매형들이 우리 가족을 생각하고 내가 겉도는
것에 대한 좋은 조언의 말들을 했지만 나로서는 당시 아무말도 머리에 들어
오지를 않았다. 그저 그 자리만을 빠져나오고 싶엇을뿐. 그냥 술한잔 받아
마시며 얘기나 듣고 잇을수도 있었건만 나로서는 혼자있고 싶었다. 먼저 들
어간다 하고 술집을 나왔다. 집으로 들어가기가 싫었다. 무작정 걸었다. 담
배를 한 개비 피워물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걸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
고 보니 집을 중심으로 빙빙 돌고 있었다. 갈곳이 없었다. 전에 봐두었던
놀이터로 향했다. 이론 연인들이 있다. 그냥 걸었다. 노래방이 눈에 들어왔
다. 마구 소리치고 싶었다. '한 여름밤의 꿈' '달팽이' '꿈결같은 세상' '
사랑했어요' '사랑일뿐야' '추억만들기' '내사랑 내곁에' '흐린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비처럼 음악처럼' '한 사람을 위한 마음' '분홍 립스틱' 을 불
렀다. 오랜만에 목에 힘주며 노래를 불렀다. 12시가 넘어 집에 들어왔다.
왜냐. 그냥. 내가 왜 이렇게 되어가는지 모르겠다. 이게 대인공포증인가?
무엇이 날 이렇게 만들어 가는지. 오늘이 큰누나 생일이라는데 까마득이 모
르고 있었다. 담배를 다시 문다....

---- 콜라를 마시며 정구.